나는 산이 참 좋다. -당성증(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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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춘 작성일10-02-19 11:48 조회2,653회 댓글0건본문
나는 산이 참 좋다.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개개인마다 다양할 것이다. 내가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나, 삶에 지칠 때, 또는 마음에 뭔가로 충만해 지고 싶어질 때 등. 신앙처럼 주저 없이 산에 오르는 이유는 뭘까?
나는 가평군 명지산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했던 집안 형편으로 형과 누나들은 읍내까지 걸어서 2~3시간 걸리는 학교로 등교하였고 당연히 산세가 험한 명지산 귀목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부모님은 일찍 해가 지는 산촌에 들어서는 자식들에 대한 걱정과 연민으로 늘 어린 나의 손을 잡고 6.25 사변 당시 퇴각하는 북한군에 의해 산채로 나무에 교수형을 당한 주민들의 영혼이 들끓는다는 귀목고개에서 하교하는 자식을 마중하셨다. 어둠 속에서 인기척을 느끼면 큰소리로 ‘엄마’, ‘성증아’를 부르며 저편에서 뛰어오는 형제들의 가파라진 발소리에 맞춰 나도 자리에서 둥둥 뛰었었다. 서로의 살을 부비며 산 아래로 걸어가던 그 명지산은 서너 살 어린 나에게 그리움이고, 설렘이고, 반가움이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가족이다.
중학교시절 내성적이고, 수줍던 내게 부모님이 유도를 권유하셨고, 유도에 빠진 만큼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야 했다. 대학입학 후의 유도는 도장에서의 훈련보다, 부아산에서의 초인적인 체력단련이 오늘의 나로 서게 했다. 유도복 끈으로 질끈 동여맨 도복을 어깨에 걸치고 캠퍼스를 거드름 피우고 다녔지만, 한낮에 학교 뒤 부아산을 묵묵히 오르면 거드름은 겸손이 되고, 주눅 들지 않으려던 눈매는 동승의 해말간 초승달처럼 해실거렸다. 새벽훈련시간에는 쳐다보기도 싫은 두려움의 산이었던 부아산은 도복을 베게 삼아 산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자면 내게 삶의 목표와, 희망, 안식을 주던 어머니였다.
서울로 이사와 도봉산입구에 살던 초등학교시절은 도봉산이 놀이터였다. 만장봉, 망월사 모두가 가진 것 없고 철없던 산 아이들에게 풍족하고 멋진 놀이터였고 산열매는 우리들의 주전부리이기도, 주머니에 꼭꼭 눌러 넣어 가족에게 갖다 주기도 했던 정(情)이었다. 아내와 연애할 때 데이트코스는 당연히 도봉산이었다. 휴일이 되면 형수님이 싸주신 도시락을 만월암에서 다리를 뻗고 풍경을 내려다보며 먹고, 다시 의정부로 이어진 원도봉산 등산로로 내려와 부대찌개를 먹고 헤어지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아내가 도봉산 등산코스를 꿸 정도가 되었으니... 30년을 함께한 도봉산은 추억과, 청춘과 사랑을 나눈 친구이다.
몇 해 전 유도를 하던 중 과욕으로 오른쪽 다리 십자인대가 끊어져서 봉합수술을 받고 한동안 지겟다리에 의지해 다녔었다. 그 때 거실에서 바라본 집 앞의 봉화산은 나와는 아주 먼 거리에 있었다. 단숨에 뛰어오르던 산이 한나절코스가 될지 모른다는 절망감으로 산을 외면하고 잊으려 했다. 그러나 약해진 다리의 재활훈련을 한 장소는 학교 앞 망우산이었다. 점심시간에, 퇴근길에 틈만 나면 오르는 산행을 꾸준히 한 결과 다친 다리는 육안으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고, 정기검진 때 주치의선생도 산에서의 나만의 재활성공에 박수를 보내주었다. 망우산은 내게 자신감과 건강을 주었다.
고향인 가평 연인산 끝자락에 작은 집을 지어 부모님께서 소일 삼아 텃밭을 가꾸시게 했다.
‘우리는 주중부부‘라는 아내의 푸념도 뒤로 넘기고 가평으로 가는 것은 뒤에는 연인산, 앞에는 보납산이 있기 때문이다. 산은 말이 많다. 봄 옷을 입었다. 아프다.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없어졌다. 물맛이 좋다. 노루가, 고라니가 많아졌다.... 나는 궁금하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다.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의 말대로 내 눈에선 빛이 나고 얼굴은 내내 웃고 있다. 그 말이 맞다. 나는 산이 좋다 그냥 좋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함께하고, 배우고, 나누는 게 산과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자일 등 산악장비를 갖추고 암벽을 타는 전문 산악인은 아니다. 외국의 산을 다녀본 산꾼도 아니다.
많은 산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주변의 산에서 부드러운 맛을 느끼는 산마니아일 뿐이다. 산은 내가 어떤 심중으로 올라가도 그걸 해결하는 길을 터득하게 해준다. 평탄하고 잘 다듬어진 길도 있지만. 때로는 꼬불꼬불한 길에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깔닥고개도 있고, 여유로운 내리막길도 있다. 우리들의 인생살이와 무엇이 다를까?
산행은 그 누구의 도움도 아닌 순전히 자신의 결심과 노력으로 한걸음, 한걸음 올라야 한다. 등산은 도시생활에 지친 심신을 정화시키는 데 가장 좋은 운동이지만 ‘금방 내려올 걸 왜 그리 힘들게 올라가나?’며 무의미하고 힘든 운동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산에 오르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즐거운 방법으로 산을 타면 될 것이다. 힘이 든다면 동네의 야산을 골라 정상보다는 중턱을 목표로 삼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거나, 늘린다면 평생의 스포츠가 될 수 있다. 무의미하다고 느끼면 산의 수목이나, 암석, 계절의 꽃과 곤충, 새 등에 관심을 두고 관찰하면서 걷는다면 저절로 여유로운 리듬이 생겨서 이상적인 운동이 되리라 확신한다.
우리 지금 책을 덮고 천천히 등산구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개개인마다 다양할 것이다. 내가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나, 삶에 지칠 때, 또는 마음에 뭔가로 충만해 지고 싶어질 때 등. 신앙처럼 주저 없이 산에 오르는 이유는 뭘까?
나는 가평군 명지산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했던 집안 형편으로 형과 누나들은 읍내까지 걸어서 2~3시간 걸리는 학교로 등교하였고 당연히 산세가 험한 명지산 귀목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부모님은 일찍 해가 지는 산촌에 들어서는 자식들에 대한 걱정과 연민으로 늘 어린 나의 손을 잡고 6.25 사변 당시 퇴각하는 북한군에 의해 산채로 나무에 교수형을 당한 주민들의 영혼이 들끓는다는 귀목고개에서 하교하는 자식을 마중하셨다. 어둠 속에서 인기척을 느끼면 큰소리로 ‘엄마’, ‘성증아’를 부르며 저편에서 뛰어오는 형제들의 가파라진 발소리에 맞춰 나도 자리에서 둥둥 뛰었었다. 서로의 살을 부비며 산 아래로 걸어가던 그 명지산은 서너 살 어린 나에게 그리움이고, 설렘이고, 반가움이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가족이다.
중학교시절 내성적이고, 수줍던 내게 부모님이 유도를 권유하셨고, 유도에 빠진 만큼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야 했다. 대학입학 후의 유도는 도장에서의 훈련보다, 부아산에서의 초인적인 체력단련이 오늘의 나로 서게 했다. 유도복 끈으로 질끈 동여맨 도복을 어깨에 걸치고 캠퍼스를 거드름 피우고 다녔지만, 한낮에 학교 뒤 부아산을 묵묵히 오르면 거드름은 겸손이 되고, 주눅 들지 않으려던 눈매는 동승의 해말간 초승달처럼 해실거렸다. 새벽훈련시간에는 쳐다보기도 싫은 두려움의 산이었던 부아산은 도복을 베게 삼아 산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자면 내게 삶의 목표와, 희망, 안식을 주던 어머니였다.
서울로 이사와 도봉산입구에 살던 초등학교시절은 도봉산이 놀이터였다. 만장봉, 망월사 모두가 가진 것 없고 철없던 산 아이들에게 풍족하고 멋진 놀이터였고 산열매는 우리들의 주전부리이기도, 주머니에 꼭꼭 눌러 넣어 가족에게 갖다 주기도 했던 정(情)이었다. 아내와 연애할 때 데이트코스는 당연히 도봉산이었다. 휴일이 되면 형수님이 싸주신 도시락을 만월암에서 다리를 뻗고 풍경을 내려다보며 먹고, 다시 의정부로 이어진 원도봉산 등산로로 내려와 부대찌개를 먹고 헤어지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아내가 도봉산 등산코스를 꿸 정도가 되었으니... 30년을 함께한 도봉산은 추억과, 청춘과 사랑을 나눈 친구이다.
몇 해 전 유도를 하던 중 과욕으로 오른쪽 다리 십자인대가 끊어져서 봉합수술을 받고 한동안 지겟다리에 의지해 다녔었다. 그 때 거실에서 바라본 집 앞의 봉화산은 나와는 아주 먼 거리에 있었다. 단숨에 뛰어오르던 산이 한나절코스가 될지 모른다는 절망감으로 산을 외면하고 잊으려 했다. 그러나 약해진 다리의 재활훈련을 한 장소는 학교 앞 망우산이었다. 점심시간에, 퇴근길에 틈만 나면 오르는 산행을 꾸준히 한 결과 다친 다리는 육안으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고, 정기검진 때 주치의선생도 산에서의 나만의 재활성공에 박수를 보내주었다. 망우산은 내게 자신감과 건강을 주었다.
고향인 가평 연인산 끝자락에 작은 집을 지어 부모님께서 소일 삼아 텃밭을 가꾸시게 했다.
‘우리는 주중부부‘라는 아내의 푸념도 뒤로 넘기고 가평으로 가는 것은 뒤에는 연인산, 앞에는 보납산이 있기 때문이다. 산은 말이 많다. 봄 옷을 입었다. 아프다.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없어졌다. 물맛이 좋다. 노루가, 고라니가 많아졌다.... 나는 궁금하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다.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의 말대로 내 눈에선 빛이 나고 얼굴은 내내 웃고 있다. 그 말이 맞다. 나는 산이 좋다 그냥 좋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함께하고, 배우고, 나누는 게 산과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자일 등 산악장비를 갖추고 암벽을 타는 전문 산악인은 아니다. 외국의 산을 다녀본 산꾼도 아니다.
많은 산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주변의 산에서 부드러운 맛을 느끼는 산마니아일 뿐이다. 산은 내가 어떤 심중으로 올라가도 그걸 해결하는 길을 터득하게 해준다. 평탄하고 잘 다듬어진 길도 있지만. 때로는 꼬불꼬불한 길에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깔닥고개도 있고, 여유로운 내리막길도 있다. 우리들의 인생살이와 무엇이 다를까?
산행은 그 누구의 도움도 아닌 순전히 자신의 결심과 노력으로 한걸음, 한걸음 올라야 한다. 등산은 도시생활에 지친 심신을 정화시키는 데 가장 좋은 운동이지만 ‘금방 내려올 걸 왜 그리 힘들게 올라가나?’며 무의미하고 힘든 운동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산에 오르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즐거운 방법으로 산을 타면 될 것이다. 힘이 든다면 동네의 야산을 골라 정상보다는 중턱을 목표로 삼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거나, 늘린다면 평생의 스포츠가 될 수 있다. 무의미하다고 느끼면 산의 수목이나, 암석, 계절의 꽃과 곤충, 새 등에 관심을 두고 관찰하면서 걷는다면 저절로 여유로운 리듬이 생겨서 이상적인 운동이 되리라 확신한다.
우리 지금 책을 덮고 천천히 등산구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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