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도 복합심리 - 오명식(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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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춘 작성일10-02-01 13:46 조회2,487회 댓글0건본문
어느 날 여우가 산책을 나섰다.
어느 계곡 길을 돌아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데, 절벽 한 귀퉁이에 탐스럽게 익은 포도송이가 달려있는 게 아닌가? 때마침 배고픔에 그것을 따 먹기로 작정했다. 보면 볼수록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절벽 높이 매달려 있어서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심을 했다. 뛰어보고 또 뛰었다. 하지만 뛰어봤자 여우였다.
만일 사람 같았으면 사다리를 이용해서라도 목적을 이루겠지만, 한낱 여우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끝내 포기해야 하는 결론에 이른다. 아쉽다. 놓친 고기가 더 크게 보였으니, 그 포도는 더욱 맛있게 보였다.
스스로 생각할 때 더없이 아쉽고 자존심도 상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자기합리화 쪽으로 마무리를 하고 상한 마음을 달랜다.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었다. 그래서 시다. 고로 나는 저 포도를 따 먹지 않고 그냥 간다.’ 자존심이 강한 여우는 이것을 이름 붙여 ‘신포도 복합심리’라고 명했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 따 먹는 게 아니라, 아직 덜 익었기 때문에 그냥 가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한국 방문 때, 주제넘게도 모 회사에서 신입사원모집 면접관으로 일 한 적이 있다.
별 능력도 없는 내가 그 어려운 면접을 담당할 정도의 회사라면 말이 회사이지, 아직은 채 기틀도 안 잡힌 상태였다. 앞날 또한 예측 불가능한 열악한 수준의 회사일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쉽게 찾기도 힘든 작은 모집광고를 보고 찾아 온 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니 채용해 주시오”라고 면접에 응한 사람 자체도 아직은 완성된 인생이라 말 할 수 없었다. 우선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는 필수였다.
“월급은 얼마예요, 상여금은요, 토요일에도 정상 근무해요?”
어찌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질문부터 주저하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서로 마찬가지였겠으나 처음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별로 호감은 없었지만 찾아 온 성의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서로에 대한 합의점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황당한 내용부터 알고자 하는 그 모습에서 나는 가슴 아프다. 말문을 돌린다. 이력서 상단에 주소, 성명, 출신학교 등을 기재하고 아래에는 한두 군데의 경력 사항을 나열했다.
“왜 이 좋은 회사를 그만 뒀습니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서요...”
“보기보다 비전이 없더군요.”
서글프게도 그 대답이 모두 대동소이하다. 자신의 능력이 결여되고 성품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자인하고 그것의 만회를 위해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는 마음의 자세는 일절 표현되지 않았다.
자기소개서를 보면 더욱 그럴싸하다. 모두가 투철한 철학이 있고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에까지 이바지할 수 있다는 집념과 의지의 소유자들이었다.
나는 속으로 다시 묻고 싶었다. 왜 모든 것이 남의 탓인가? 진실로 자신은 언제나 올바르고 능력 있고 참신한가? 남이 하는 일은 전부가 어설프고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정당한가? 지금의 불편한 내 처지가 모두 남의 탓이며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인가? 제도가 잘못되고 위정자들이 정치를 바로 못한 탓이며 수상한 세월의 탓인가?
지금 너와 내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 너와 내가 없어도 이 사회는 오늘도 발전하고 있으며, 누군가 좀 더 나은 실력자들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나는 다시 스스로 주문을 외듯 속으로 다짐했다.
“남의 탓을 말자. 우리도 남과 같이 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하자.”
그 순간 언제였던가? 자주 듣던 말들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심심찮게 들어 온 말이 아닌가?
너무도 식상할 만큼 많이 듣던 구절이다.
“우리 아들 법 없이도 살아요. 얼마나 착한데요. 그런데 글쎄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만... 속상해서 죽겠어요.”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여운 법이다. 남의 자식 탓일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의 탓 의식 속에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 보이지 않는 정신적 사고방식은 일생 동안 판에 박힌 타성으로 고착되어졌는지 모른다. 못되면 조상 탓이듯...
자신은 운전을 잘 한다. 어쩌다 교통법규를 어겨도 원활한 교통의 흐름을 위해서다. 끼어들기를 해도 자신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며, 접촉사고가 발생하면 당연히 잘못은 상대방에게 있다.
남의 차 뒤꽁무니를 들이받아도 마땅히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 앞 차가 시도 때도 없이 급제동을 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에 낙선하면 의당 부당선거요, 사퇴의 변은 “이런 썩은 정치판에서는 더 이상 소신을 펼치기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의 탓을 말라! 설사 상대가 나를 속이고 실망을 시킬지라도 결국은 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원망하지 말라! 어떤 경우라도 남의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지. 결코 무슨 일이나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길과 방법을 찾고, 포기하지 않으며 도전하리라.
스스로의 괴리에 참말로 흡수되지 않으리라.
절벽 위의 포도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따 먹지 못한 것이지, 결코 덜 익은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 맛있는 포도송이를 따서 상큼한 맛을 즐길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단맛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라졌다. 아니 지금부터라도 달라져야 한다.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변화된 자화상! 이젠 우리가 그려가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나의 삶, 나의 길, 이 길 위에서 정녕 포기 할 수 없기에, 신포도 핑계로 나를 달래지 않으리라.
이상야릇한 복합심리 앞에서.
어느 계곡 길을 돌아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데, 절벽 한 귀퉁이에 탐스럽게 익은 포도송이가 달려있는 게 아닌가? 때마침 배고픔에 그것을 따 먹기로 작정했다. 보면 볼수록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절벽 높이 매달려 있어서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심을 했다. 뛰어보고 또 뛰었다. 하지만 뛰어봤자 여우였다.
만일 사람 같았으면 사다리를 이용해서라도 목적을 이루겠지만, 한낱 여우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끝내 포기해야 하는 결론에 이른다. 아쉽다. 놓친 고기가 더 크게 보였으니, 그 포도는 더욱 맛있게 보였다.
스스로 생각할 때 더없이 아쉽고 자존심도 상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자기합리화 쪽으로 마무리를 하고 상한 마음을 달랜다.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었다. 그래서 시다. 고로 나는 저 포도를 따 먹지 않고 그냥 간다.’ 자존심이 강한 여우는 이것을 이름 붙여 ‘신포도 복합심리’라고 명했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 따 먹는 게 아니라, 아직 덜 익었기 때문에 그냥 가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한국 방문 때, 주제넘게도 모 회사에서 신입사원모집 면접관으로 일 한 적이 있다.
별 능력도 없는 내가 그 어려운 면접을 담당할 정도의 회사라면 말이 회사이지, 아직은 채 기틀도 안 잡힌 상태였다. 앞날 또한 예측 불가능한 열악한 수준의 회사일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쉽게 찾기도 힘든 작은 모집광고를 보고 찾아 온 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니 채용해 주시오”라고 면접에 응한 사람 자체도 아직은 완성된 인생이라 말 할 수 없었다. 우선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는 필수였다.
“월급은 얼마예요, 상여금은요, 토요일에도 정상 근무해요?”
어찌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질문부터 주저하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서로 마찬가지였겠으나 처음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별로 호감은 없었지만 찾아 온 성의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서로에 대한 합의점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황당한 내용부터 알고자 하는 그 모습에서 나는 가슴 아프다. 말문을 돌린다. 이력서 상단에 주소, 성명, 출신학교 등을 기재하고 아래에는 한두 군데의 경력 사항을 나열했다.
“왜 이 좋은 회사를 그만 뒀습니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서요...”
“보기보다 비전이 없더군요.”
서글프게도 그 대답이 모두 대동소이하다. 자신의 능력이 결여되고 성품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자인하고 그것의 만회를 위해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는 마음의 자세는 일절 표현되지 않았다.
자기소개서를 보면 더욱 그럴싸하다. 모두가 투철한 철학이 있고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에까지 이바지할 수 있다는 집념과 의지의 소유자들이었다.
나는 속으로 다시 묻고 싶었다. 왜 모든 것이 남의 탓인가? 진실로 자신은 언제나 올바르고 능력 있고 참신한가? 남이 하는 일은 전부가 어설프고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정당한가? 지금의 불편한 내 처지가 모두 남의 탓이며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인가? 제도가 잘못되고 위정자들이 정치를 바로 못한 탓이며 수상한 세월의 탓인가?
지금 너와 내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 너와 내가 없어도 이 사회는 오늘도 발전하고 있으며, 누군가 좀 더 나은 실력자들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나는 다시 스스로 주문을 외듯 속으로 다짐했다.
“남의 탓을 말자. 우리도 남과 같이 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하자.”
그 순간 언제였던가? 자주 듣던 말들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심심찮게 들어 온 말이 아닌가?
너무도 식상할 만큼 많이 듣던 구절이다.
“우리 아들 법 없이도 살아요. 얼마나 착한데요. 그런데 글쎄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만... 속상해서 죽겠어요.”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여운 법이다. 남의 자식 탓일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의 탓 의식 속에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 보이지 않는 정신적 사고방식은 일생 동안 판에 박힌 타성으로 고착되어졌는지 모른다. 못되면 조상 탓이듯...
자신은 운전을 잘 한다. 어쩌다 교통법규를 어겨도 원활한 교통의 흐름을 위해서다. 끼어들기를 해도 자신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며, 접촉사고가 발생하면 당연히 잘못은 상대방에게 있다.
남의 차 뒤꽁무니를 들이받아도 마땅히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 앞 차가 시도 때도 없이 급제동을 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에 낙선하면 의당 부당선거요, 사퇴의 변은 “이런 썩은 정치판에서는 더 이상 소신을 펼치기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의 탓을 말라! 설사 상대가 나를 속이고 실망을 시킬지라도 결국은 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원망하지 말라! 어떤 경우라도 남의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지. 결코 무슨 일이나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길과 방법을 찾고, 포기하지 않으며 도전하리라.
스스로의 괴리에 참말로 흡수되지 않으리라.
절벽 위의 포도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따 먹지 못한 것이지, 결코 덜 익은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 맛있는 포도송이를 따서 상큼한 맛을 즐길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단맛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라졌다. 아니 지금부터라도 달라져야 한다.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변화된 자화상! 이젠 우리가 그려가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나의 삶, 나의 길, 이 길 위에서 정녕 포기 할 수 없기에, 신포도 핑계로 나를 달래지 않으리라.
이상야릇한 복합심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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