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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거장, 작곡가 김동진 선생 -정창식(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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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춘 작성일10-02-01 12:24 조회3,2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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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은 1913년 3월 22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신교의 목사인 덕분으로 이미 취학하기 전부터 살아있는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기독교 신앙이 철저한 목사의 가정에서 종교적인 엄격함과 함께 음악적인 재능을 서양음악으로 키워나갈 수 있었으며 또한 이 방면의 흥미를 천부의 소질로 깊이 파고 들어간 것이다.

그는 최초의 음악적 체험을 교회 안의 풍금 소리에서 기억해 낸다.
그는 5,6세 때에 이미 스스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소질을 깨달았다. “음악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아무래도 나의 부친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의 풍금일 것이다. 나는 자주 풍금을 장난 삼아 내가 배운 노래를 짚어보면
서 음의 신비로움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었다”고 회고하는 데서 엿볼 수가 있다.
김동진은 1927년 안주 유신소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진학했다.

3학년 때 선교사 말스베리(Dwight R. Malsbary)를 학교에서 스승으로 만났는데 그가 말스베리를 만나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은 것은 좀 늦은 감이 있었으나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계기를 <최초이며 영원한 은사로 모시게 된 말스베리 선생을 뵙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술회한다.
이 무렵 김동진은 김동환(金東煥)의 <봄이오면>, 주요한의 <부끄러움>, 이광수의<외붓 한 자루> 등의 3인 시가집 (三人時歌集) 을 애송하고 있었는데 '봄이오면'을 작곡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고 술회한다.
"당시 (중학교5학년,졸업할 때)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학교 음악실에 가서 혼자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난 다음 풍금을 치면서 발성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 속에 종종 암송해 오던 '봄이 오면'의 한 소절인 <건너 마을 젊은 처자>의 악상이 떠오르면서 황급히 나의 손가락은 풍금 건반을 짚어가
고 있었다. 즉시 5선지에 그 선율을 옮겨 놓았다. 반복해서 풍금소리에 맞춰 불러보았다. 감히 내가 작곡한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는 황홀경에 빠져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온 기숙사에 퍼졌다. 이웃 숭실전문학교의 기숙사에까지 알려져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나아가서 학생들이 나가는 교회의 학생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애창되었다.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큰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이때부터 작곡에 대한 집념과 자신감이 더욱 강렬해졌다.
잠시 머무는 생각이 아니라 영원히 치달리고 싶은 각오와 맹세처럼 의욕이 솟아오르게 된 것이다.”

그가 예술적인 영감을 얻어 작곡했다고 보는 '봄이 오면'은 그가 작곡가로서 대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가 한 줄의 시가 영감에 의해 쓰여졌다면 나머지 아홉 줄의 시는 시인의 노력과 집중에 의해 쓰여졌다는 이야기처럼 김동진에게도 항상 작곡에의 집념과 열성이 어느 날 밤 홀연히 그에게 영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고서도 계속 말스베리 선생의 지도를 받아가며 작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무렵 이은상의 시 <가고파>를 비롯 <발자욱>,<당달구>,<뱃노래> 등의 가곡을 작곡했다. 뒤에 불세지공(不世之功)의 명성을 얻게 된 <가고파>는 말스베리 선생으로부터 김동진이 작곡가로서의 천재성을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일본의 니혼고등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김창덕 목사(부친의 친구)의 종용으로 1939년 중국 만주의 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해 제1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하고 지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가곡 <내 마음> 과 <수선화> 도 작곡했는데 두 곡을 작곡할 때의 심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수선화> 는 낭만적인 성격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거의 즉흥적이리 만큼 건반을 쳐보면서 작곡되었다.
또 <내 마음> 은 시가 좋아 늘 애송하며 작곡할 것을 시도했다. 그래서 신경의 유명한 호수인 남호(南湖)를 찾아서 악상을 얻으려 애썼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돌연 악상이 샘솟듯 솟아 올랐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저어 오오> 에 대한 선율이 떠오른 것이다."
1953년은 김동진의 음악가로서의 생애가 무르익기 시작한 해이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서라벌 예술대학의 음악과 교수로 부임했다. 이때 소월 시에 작곡한 <진달래꽃>,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길>, <초혼>, <못잊어> 등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1964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곡, 지휘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1974년 경희대학교 개교기념 칸타타 <대학송가>에 있는 같은 대학 총장이던 조영식 작시에 의해 국민가곡 <목련화>가 탄생되어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곡이 되었다.
필생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가극 <심청전> 은 그가 작곡을 시작한지 40년 만에 개작을 완료했다.
1978년 4월 24,25일 양일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공연으로 두 차례 초연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한국적인 양악(洋樂)을 창작하는데 몰두, 드디어 신창악(新唱樂)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국악과 접목시킨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1979년 그는 신창악연구회를 조직하여 그 보급에 힘을 썼다. 그는 <신창악은 창(唱)이면서도 창이 아니게, 창이 아니면서도 창이 되게 노래하여 판소리의 정신과 특징을 바탕으로 한 것 > 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우리의 전통음악과 서양 음악을 접목시킨 것이다. 우리 민족의 특유한 음악을 창조해 낸 것이다.
1991년 가극 <심청전>과 <춘향전> 에서 가려 뽑아 <신창악연주회> 를 갖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문화는 국적조차 모호하고 난해한 음악이 대중문화의 기류가 되어 버렸으며, 오락과 흥행위주의 방송프로그램이 방송이 전부인양 편성되어 국민의 의식과 가치판단의 기준마저 흐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흐름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순수예술의 발전과 계승은 고사하고 이제는 존립의 위기마저 느끼게 하고 있어 그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김동진은 2009년 7월 31일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고 김동진 작곡가는 특히 우리 모교의 교가를 작곡하였다는데 대해 우리와 큰 인연이 있다고 할 것이다.

⊙ 현재: 내마노 성악가 모임 구리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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